Page 9 - 2023_ON_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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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02         자전거는 스스로 중심을 잡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만나기로 했다. 만추의 늦은 오후였고, 조금은 쌀쌀했다.
               두발자전거를 말하는 것이다. 겁이 많은 나는 쭈뼛거렸지만
                                                                   체력이 빈약하여 ‘택시를 탈까’라며 잠시 갈등의 시간이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 중심 잡기에 성공했다.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작은 천을 따라 달려 마주한 한강은                         ON  2023  Autumn

               그로부터 길고 긴 날들이 지났지만 그때의 감동은                          마치 오랜만에 본가를 찾았을 때의 부모님처럼 나를 반갑고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의 달콤한 공기와 따뜻한                        격하게 환영해주었다. 도착하고 보니 어스름한 시간을
               분위기까지도. 나를 지지해주는 친구들의 응원이 한몫했던                      지나 제법 깜깜한 저녁이었다. 하늘엔 휘영청 보름달이
               것 같다.                                               둥실 떠 있었고, 한강 변을 수놓은 불빛의 반짝임은 정말
               두 번째 라이딩은 (지금은 서로의 소식을 알 수 없는                       아름다웠다.

               관계지만)가까운 사람과 떠난 당일치기 자전거 여행이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려면 우리는 여러 가지 수단을
               이때 나는 처음으로 내 자전거가 생겼다. 자전거 여행에                      이용할 수 있다. 두 다리로 직접 걸어도 되고, 자동차를
               앞서 동네 자전거포에서 서둘러 구매한 자전거로,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활용할 수 있다. 각각의 장점이

               폴딩이 되는 미니벨로였다. 나름 비용을 지불하고 구매한                      있겠지만 자전거로 이동하는 특별한 매력을 말하고 싶다.
               자전거여서, 또 가진 물건에 정을 듬뿍 주는 성격이어서                      자전거 탈 때의 진짜 매력은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애착을 가진 나의 첫 자전거였다.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풍경을 보게 하고 자연의 숨결을
               하늘은 흐리고 곧 비라도 흩뿌릴 것 같던 날씨였지만,                       느끼게 한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은 흡사 미술관에서
               좋은 사람과 새 자전거로 양평의 자전거길을 달리는 내내                      마주하는 작품 같다. 살갗에 스치는 바람에서 계절을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느낀다. 속도 지향적, 출세 지향적인 사회의 흐름에서
               세 번째는 한강에서였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자전거로                       벗어나 잠시 숨을 고르고 여유를 갖게 한다. 앞이 아니라
               한강까지 가는데 필요한 시간은 넉넉하게 2시간. 시간은                      옆을 보게 하는 것이다. 매일 비장하게 살 수밖에 없는

               비교적 길어도 단정하게 정비된 자전거길은 어렵지 않게                       현실 분위기 속에서 힘 빼기의 기술을 가르쳐준다. 또 같은
               한강까지 나를 이끌어준다. 친한 친구와 반포한강공원에서                      길이라도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자전거를 타면 지루할 틈이 없다.
                                                                   자전거만큼 세상과 나를 깊게 만나게 하는 수단이 또
                                                                   있을까. 자연과 가까이 마주함으로써 얻는 감동을 자동차의

                                                                   속도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자전거를 타는 일이 흡사 인생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평지는 하염없이 달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오르막길이 나오면

                                                                   온 힘을 주어 페달을 밟아 오르는 일이 버겁기만 하다.
                                                                   그렇다고 해도 멈춰서 다시 내려갈 수는 없다. 포기할 수
 몇                                                                 없다. 땀 뻘뻘 흘린 오르막길 뒤에는 내리막길이라는 선물
                                                                   같은 시원하고 달콤한 시간도 주어진다. 때로 두 발로

 번  글을 쓴 김민정 작가는 여성지 <여성조선>을                                       세상을 가질 수 있다.

 시작으로 <레이디경향> 기자로 일했으며, 건강 리빙                                      내 몸 하나 자전거에 의지해 호기롭게 달리면 좋으련만,
 의 라이딩      잡지 <월간 헬스조선>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다수                           자전거의 세계는 그리 녹록치 않다. 안전을 위해 헬멧과
 매체에 건강, 환경, 인터뷰 등을 기고한다.
 글 김민정
                                                                   장갑을 착용해야 하는 것은 물론, 어둠 속을 달릴 때는
                                                                   불을 밝혀주고, 앞서가는 이를 추월할 때는 따르릉 소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도 ‘함께’ 살아가는 인생 같다.
 며칠 전부터 솔솔 가을바람을 느끼며 킁킁 가을 냄새를   지극히 개인적인 계절 루틴이자 지난 추억을 더듬고 싶은    다시 올가을에는 숨을 고르고 쭉 뻗은 길을 자전거를 타고
 맡으며 좋으면서 아쉽고, 아쉬우면서 좋아서 어찌할 줄   알량한 마음의 발로이지만 나는 가을이 오면 자전거가 타고   천천히 달려보고 싶다. 여름은 가지 않았고 가을은 오지
 모르겠다. ‘이렇게 또 하나의 계절을 보냈구나’ 시간의   싶어진다. 내게는 몇 번의 라이딩의 기억이 있고 몇 번의   않았다. 여름은 그곳에 남았고 가을은 여기에 있다. 지난

 속절없음을 느끼며 아쉬운 거고, 올여름 내내 땀 꽤나   라이딩의 배경은 가을이었으며, 그건 매번 좋았던 것이다.   시간을 돌아갈 수 없다 해도 그리워하고 추억하고 기억할
 쏟았기에 오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계절이 반가운   스무 살 가을이었다. 친구들과 왁자지껄 어울려 찾은 강촌   수 있다. 그러니 아쉬워 말고 마침내 온 이곳을 다정하게
 것이다.   여행에서 내 생애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다. 물론 이때의                             달려보자. ‘함께’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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