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 - 인하대병원 ON 2023 봄호_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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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2023  Spring


                            작년 초봄, 이즈음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깊숙한 곳에 품어온 ‘소망’을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림’을 동경했고, 그림
                            ‘그리는’ 나를 갈망했다.
                            그림, 그리는 행위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스무 해 넘는 세월을 무관하게 살았다. 그저
                            우아하고 교양 있게 살고 싶어서, 근사한 삶을 꾸리고 싶은 욕심으로 미술관을 기웃거리는
                            정도였다. 미술관을 자주 들락거리기는 하지만 그림과 친해졌다고 말하기는 매우 부족한

                            수준이고, 감상평 역시 “그림 예쁘다” “색깔을 어쩜 저렇게 잘 사용할까” 정도로 궁핍하다.
                            동네를 산책하면서 화실을 ‘찜’해두었었다. 한참 만에 용기를 내어 화실 문을 연 내 앞에
                            ‘DRAWING’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인 A4 크기의 제법 도톰한 종이, 0.05mm 펜 하나,

                            그리고 연필과 지우개가 놓였다. 새하얀 백지를 앞에 두고는 글을 쓰기 위해 처음 한글 파일을
                            열었을 때처럼 아주 잠깐 막막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림 수업은 ‘선 긋기’가 시작이었다. 가느다란 선을 가로, 세로로 그리면서 손의 힘을
                            미세하게 조절해야 했다. 펜으로 선 긋기는 ‘가로’보다 ‘세로’가 더 어려웠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선 긋기, 가느다란 선을 그리기 시작한 뒤에는 삐뚤빼뚤 좀처럼 길을 찾지

                            못했다. 선 긋기가 끝나는 지점을 알 수 없어서, 확신이 없었다. 펜 그림을 시작으로 수채화,
                            아크릴화를 그리고, 색연필, 오일파스텔, 디자인 마카를 활용한 그림도 차례로 그렸다. 물론
                            남의 작품을 그대로 본떠서 그리는 ‘모작’이었지만.

                            생계형 노동자이므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 단 두 시간만 할애할 수 있었다.
                            격무에 시달리는 원고 마감 기간에는 그 두 시간도 화실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 안에 늘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초조’에서 놓여나는 경험을 했다. 크고 작은
                            ‘근심’을 잊었다. 한 마디로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여 ‘그리는 일’ 외에는 어떤
                            생각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일상에 지칠 때는 어서 화실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두 시간 동안 그림 그리는 행위를 마치고 나면 어쩐지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그림’이라는 결과물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봐, 할 수 있잖아’라는 응원의 말들.
                            주저하며 망설이는 일들도 이렇게 조금씩 그려나가는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물감과 물의 농도를 섬세하게 조절해야 하는 수채화는 여전히 어렵고, 오일파스텔은 가장
                            재미있게 다루며 (스스로)만족에 가까운 결과물을 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그사이 가까운
                            이들에게 몇 차례 그림을 선물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좋아하는 주제를 기억해뒀다가
                            기념할 만한 날 그려 선물했는데, 어설픈 ‘그림’을 받아 든 이들은 유명 화가의 작품

                            선물이라도 받은 양 수준급 리액션을 해주었기에 자꾸만 그려주고 싶었다.
                            그간 여러 가지 취미에 도전했지만 ‘그림’은 인내심 없는 내가 가장 오래 유지하는 취미가
                            되었다. 사실 여전히 무엇을 그려야 할지 잘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알겠다. 앞으로도

                            계속 그림을 그릴 거라는 것, 그것이 내 인생에 기쁨이자 즐거움이며, 행복의 순간이 될
                            거라는 사실 말이다.






                            글을 쓴 김민정 작가는 여성지 <여성조선>을 시작으로 <레이디경향> 기자로 일했으며, 건강 리빙 잡지
                            <월간 헬스조선>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다수 매체에 건강, 환경, 인터뷰 등을 기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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